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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이 교수님, 서울대학교 제76회 후기 학위수여식 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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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지수 Jisoo Y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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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80년을 건강하게 산다고 생각하면 약 3만 일을 사는 셈인데, 우리 직관이 다루기에는 제법 큰 수입니다. 저는 대략 그 절반을 지나 보냈고, 여러분 대부분은 약 3분의 1을 지나 보냈습니다. 혹시 그 중 며칠을 기억하고 있는지 세어본 적 있으신가요?

쉼 없이 들이쉬고 내쉬는 우리가 오랫동안 잡고 있을 날들은 3만의 아주 일부입니다. 먼 옛날의 나와 지금 여기의 나와 먼 훗날의 나라는 세 명의 완벽히 낯선 사람들을 이런 날들이 엉성하게 이어주고 있습니다. 마무리 짓고 새롭게 시작하는 오늘 졸업식이 그런 날 중 하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하루를 여러분과 공유할 수 있어서 무척 기쁩니다.

학위수여식에 참석할 때 감수해야 할 위험 중 하나가 졸업 축사가 아닌가 합니다. 우연과 의지와 기질이 기막히게 정렬돼서 크게 성공한 사람의 교묘하거나 진부한 자기 자랑을 듣고 말 확률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겁이 나서 아니면 충실하게 지내지 못한 대학생활이 부끄러워서 15년 전 이자리에 오지 못했습니다만, 여러분은 축하받을 만한 일을 축하받기 위해서 이를 무릅쓰고 이곳에 왔습니다.

졸업식 축사에서는 어떤 말을 하면 좋을까요? 십몇 년 후의 내가 되어 자신에게 해줄 축사를 미리 떠올려 보는 것도, 그 사람에게 듣고 싶은 축사를 지금 떠올려보는 것도 가치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당연하게 떠오르는 말은 없습니다.

지난 몇 천일, 혹은 다가올 몇천 일간의 온갖 기대와 실망, 친절과 부조리, 행운과 불행, 그새 무섭도록 반복적인 일상의 세부사항은 말하기에도 듣기에도 힘들거니와 격려와 축하라는 본래의 목적에도 어울리지 않을 것입니다. 구체화한 마음은 부적절하거나 초라합니다.

제 대학 생활은 잘 포장해서 이야기해도 길 잃음의 연속이었습니다. 똑똑하면서 건강하고 성실하기까지 한 주위 수많은 친구를 보면서 나 같은 사람은 뭘하며 살아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잘 쉬고 돌아오라던 어느 은사님의 말씀이 듬성듬성해진 성적표 위에서 아직도 저를 쳐다보고 있는 듯 합니다. 지금 듣고 계신 분들도 정도의 차이와 방향의 다름이 있을지언정 지난 몇 년간 본질적으로 비슷한 과정을 거쳤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더 큰 도전, 불확실하고 불투명하고 끝은 있지만 잘 보이진 않는 매일의 반복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힘들 수도 있고 생각만큼 힘들 수도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어른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 편안하고 안전한 길을 거부하라, 타협하지 말고 자기의 진짜 꿈을 좇아라, 모두 좋은 조언이고 사회의 입장에서는 특히나 유용한 말입니다만 개인의 입장은 다를 수 있음을 여러분은 이미 고민해봤습니다. 제로섬 상대평가의 몇가지 퉁명스러운 기준을 따른다면 일부만이 예외적으로 성공할 것입니다.

여러 변덕스러운 우연이, 그리고 지쳐버린 타인이,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기 바랍니다. 나는 커서 어떻게 살까, 오래된 질문을 오늘부터의 매일이 대답해줍니다.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1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않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게 되길 바랍니다.

오래전의 제가 졸업식에 왔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 할까 고민했습니다만 생각을 잘 매듭짓지 못했습니다. 그가 경험하게 될 날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가슴 먹먹하게 부럽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선물할 어떤 축사를 떠올리셨을지 궁금합니다.

수학은 무모순이 용납하는 어떤 정의도 허락합니다. 수학자들 주요 업무가 그 중 무엇을 쓸지 선택하는 것인데, 언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가능한 여러 가지 약속 중 무엇이 가장 아름다운 구조를 끌어내는지가 그 가치의 잣대가 됩니다.

오늘같이 특별한 날,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사람들과 함께 하니 들뜬 마음에 모든 시도가 소중해보입니다. 타인을 내가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먼 미래의 자신으로, 자신을 잠시지만 지금 여기서 온전히 함께 하고 있는 타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졸업생 여러분, 오래 준비한 완성을 축하하고 오늘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합니다.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하시길. 그리고 그 친절을 먼 미래의 우리에게 잘 전달해주시길 바랍니다. 응원합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먼 옛날의 나'와 '지금 여기의 나'가 완벽히 다르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다른 선택을 하였을까? 혹은 '먼 훗날의 나'가 '지금 여기의 나'와 완벽히 낯설 것이라는 진실이 '지금 여기의 나'의 어리석음을 파괴해줄 수 있을까? 어쩌면 알면서도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되는 게 평범한 인간인 듯 싶다.

무의미 뿐만 아니라 의미도 폭력일 때가 있음이 요즘 들어 더욱 와닿는다. 의미는 내가 주체적으로 부여할 때 생겨나니까. 무의미를 견디지 못하고 계속 부여하고 있으니까. 이 과정 자체가 스스로를 가장 모질게 대하며 행사하는 폭력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에 맞서 하루 하루의 경험에 온전히 초점을 맞춰야만 아무 아쉬움 없이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26살의 나는 16살의 나에게 이렇게 말해줄 듯 싶다.

축하해, 너는 결국 교사 자격증을 얻었고 교사라는 이름으로 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했어. 근데 학교에서 일하는 너는 새로운 꿈을 꾸더라. 과연 16살의 너가 정말 교사가 되길 원했던 건지, 네가 경험한 세상이 그게 다여서 그랬던 건지, 10년 후에도 확답은 할 수 없더라. 다만, 미래는 절대 예측할 수 없이 변하고 세상은 자신의 꿈의 크기만큼 넓은 것 같아. 그러니까 지금 하는 것 자체에서 의미를 찾고, 내일은 그보다 더 큰 의미를 찾아보면서 나아가길 바랄게.

10년 후의 나는 어떤 경험했고, 지금 이순간의 나에게 그 중 무엇을 축하해주고 싶을까 지금 나는 10년 후의 나로부터 무슨 말이 듣고 싶을까

이토록 마음에 와닿은 그의 당부와 응원의 말을 여러번 반복해서 다시 들여다보길 반복하다가 오늘 하루를 털어내었다.